봄의 노란 물결을 걷다, 유채꽃 여행기
봄의 노란 물결을 걷다, 유채꽃 여행기
"그 봄날의 노란 기억"
겨울이 채 물러가지 않은 어느 3월 말, 나는 갑작스레 떠나고 싶어졌다. 마음속 어딘가에 쌓인 무거움이 햇살 아래서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우연히 마주친 한 장의 사진—유채꽃이 만개한 들판 속을 걷는 풍경—그 한 장에 이끌려 여행을 결심했다.
행선지는 경남 창녕의 남지 유채꽃 축제장. 매년 봄, 낙동강변에 노란 물결이 출렁인다는 그곳. 서울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마산을 거쳐, 버스를 갈아타고 도착한 남지읍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마치 이 풍경을 혼자 즐기라는 배려처럼.
첫걸음, 노란 숨결이 밀려오다
강변으로 향하는 길, 바람 속에 봄내음이 묻어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지 않아도 좋았다. 도착한 유채꽃밭은 정말 말 그대로 황홀했다. 한없이 펼쳐진 노란 꽃밭, 그 사이로 이어진 오솔길, 그리고 그 길 위에 선 나.
유채꽃은 향기롭다기보단 산뜻하다. 초봄의 공기처럼. 노란색은 누군가의 웃음 같고, 잊고 있었던 기쁨 같았다. 나는 걷는 속도를 최대한 느리게 줄였다. 걸을수록 마음이 가벼워졌다. 사진을 찍지 않아도 충분히 기록되는 그런 순간들이었다.
강변을 따라 걷는 감성
낙동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물결 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강 건너편의 풍경은 마치 수채화처럼 번졌다. 유채꽃과 강물, 그리고 하늘이 어우러진 이 풍경은 말이 필요 없는 언어였다.
길가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꺼냈다. 햇볕에 따뜻해진 빵을 한 입 베어물며, 문득 마음속에 오래된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런 날이 있다. 꽃과 강물 앞에서 기억은 유난히 선명해진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그 사람의 웃음, 그 봄날의 공기.
작은 장터와 봄의 소리들
축제장 근처에는 소박한 장터가 열려 있었다. 아이 손을 잡은 엄마, 어깨동무한 친구들, 카메라를 든 노부부까지.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봄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도토리묵 한 접시와 직접 짠 유자청을 샀다. 음식도 풍경도 이곳에선 다르게 느껴졌다.
귀에 들리는 건 새소리, 강물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 봄은 원래 소리로 피어난다.
노을 속의 노란 들판
시간이 흘러, 해가 지기 시작했다. 유채꽃밭 위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와 노을이 함께 물들었다. 황금빛 꽃잎 위로 주홍빛 햇살이 겹쳐지며, 온 세상이 따뜻하게 불타오르는 듯했다.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으려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그건 그냥 가슴에 담는 게 더 맞는 장면이었다.
나는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짧은 하루였지만, 마음만큼은 꽉 찼다. 유채꽃이 나에게 건넨 건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멈춤'과 '느림' 그리고 '기억'이라는 이름의 봄 선물이었다.
"유채꽃은 봄을 닮은 위로다"
여행이 꼭 멀리 가야만 하는 건 아니다. 때론 한 폭의 풍경, 한 줄기 향기만으로도 우리는 멀리 다녀온 것 같은 위로를 받는다. 유채꽃은 그렇게 말 없는 위로로 내 마음을 흔들었다.
다가오는 봄, 당신도 노란 물결 사이를 걸어보길. 그 길 끝엔 어쩌면 오래 잊고 있었던 당신의 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