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 문제의 근원-신학적 빈곤(김세윤)
문제 의식 : 한국교회의 역사가 겨우 120여 년임을 염두에 둔다면 현재 수준의 신학적 성숙을 이룬 것을 높이 평가하지만,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실현하는 데 보이는 전반적인 무능함과 일부의 심각한 부패의 근본 원인을 ‘신학적 빈곤’ 때문이다.
- 복음의 부분적 이해, 오해, 왜곡
대다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불교적 의미의 내세와 같이 생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우리의 영혼이 내세에 영생을 얻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한국교회는 복음을 주로 바울의 칭의의 범주로 선포하는데, 이 칭의론을 법정적 개념으로만 이해하여 그것의 관계론적 측면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죄용서/무죄선언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적 삶을 청산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관계,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도 포함한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빈곤은 예정론의 의미와 의도에 대한 이해부족으로도 나타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부족한 이해와 바울의 칭의 복음의 부분적 이해가 예정론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우리는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 받는 것이며, 그렇게 한번 얻은 구원은 우리의 삶과 관계없이 영원히 보장된 것이다”라는 ‘구원파적 복음’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빈곤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입각하여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정립하고 사물을 평가하며, 올바른 삶의 방식을 헤아리는 능력, 즉 신학적 사고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2) 윤리 부재
왜곡된 ‘복음’이 한국교회의 신학적 빈곤이 가져온 가장 심각한 현상이라면, 그것이 초래한 윤리 부재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빈곤의 가장 돋보이는 현상일 것이다. 구원을 얻는 ‘믿음’을 회심 때 한 신앙고백으로만 이해하고, ‘믿음생활’을 교회 생활에의 참여, 기도하기, 전도하기 등에 국한하고, 날마다의 실존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삶 일체와 연결하지 않는다. 윤리적 삶이 우리를 의인 되게 하신 하나님괴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킨 믿음의 천명으로서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믿음생활’을 추구하는 일을 등한시하는 것이다.
‘은혜로만/믿음으로만 칭의됨’의 복음 자체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요구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곧 그를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상급’신학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가 없어 구약의 제사장들의 예에 호소하며 사제주의적 자기 이해를 표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신학적 사고 능력이 빈약하기 때문에 ‘은혜로만/믿음으로만’ 그리고 ‘만인사제론’의 종교개혁의 구호들을 외치는 자신들이 그러한 가르침들로 그 구호들을 거슬러 중세 카톨릭교회로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복음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신학적 사고 능력의 결핍에서 연유되는 기독교적 삶(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포괄적으로 순종하는 삶)의 부재, 즉 기독교 윤리의 부재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한국사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 곧 샬롬을 실재화하는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한다.
3) 선교에 대한 편협한 이해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선교 명령을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전의 종교를 버리고(회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하여 ‘영혼’의 구원을 얻도록 하는 ‘구령사업’을 하라는 것으로만 이해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하는 것, 즉 그것을 대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실현하고 확대하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도 포함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4) 미신적 영성
한국교회는 신학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한국인들의 심령속 깊이 자리 잡은 샤머니즘을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복음을 샤머니즘적으로 왜곡하여 미신적 영성을 조장하고 있다. 고전 12:1-3에서 바울은 성령의 현상은 신비스럽게 보이며 우리를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체험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한 예수를 주로 인식하고, 그에게 의지하며 순종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윤리적 선택의 갈림길에서 사탄이 가리키는 악의 길과 주 예수께서 가리키는 선의 길을 구분하여 인식하게 하고, 우리의 육신을 유혹하여 죄를 짓도록 하는 사탄의 사주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주 예수의 길을 택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성령의 열매”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하는 도덕적 자질들이나 그런 올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복들로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복음에 입각하여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성령의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성경의 몇 구절들을 문자적, 원시적으로 해석하여 귀신론적 ‘영적 전쟁’론을 펼치고, ‘땅 밟기’등 미신적 ‘선교’를 하며, 심지어 ‘가계저주론’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사랑과 죄 용서의 복음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단 사설들을 퍼뜨리고 있는지 모른다.
5) 이단사설들에 쉽게 휩쓰림
위와 같은 문제들로 이단사설들에 쉽게 휩쓸리기도 하지만, 성경에 대한 근본주의적 태도가 많은 성도들을 이단 사설들에 쉼게 휩쓸리게 한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고 강조하면서 여러가지 비평양식들을 반대하지만, 결국 이런 모습들이 성경의 본문들을 그들의 역사적, 문학적 맥락을 무시하고 신학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교리나 전통, 또는 선호하는 사상이나 행동양식등을 뒷받침하는 증거 본문들로 사용한다. 이렇게 신학이 빈곤한, 특히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도록 가르치는 한국의 교회들은 이단자들에게 가장 좋은 온상을 제공하여, 너무나 많은 성도들을 그들의 밥이 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6) 원인들
한국에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신학교육의 방법과 질도 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김세윤 교수는 한국의 신학교육이 신학도들, 목사들에게 역사비평을 비롯한 다양한 비평 방법을 건설적으로 사용하여 성경을 옳게 해석하고 그 가르침들을 깊이 있게 터득하는 훈련과, 또 기독교 신앙고백의 실존적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고 그 고백에 따른 삶과 사역을 모색하는 신학적 사고의 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것만 지적하려고 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점으로 말하는 것은 일부 목사들이 의도적으로 우중화의 목회를 한다는 사실이다.(이 내용은 다음에 하는 2장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
7) 맺는 말:신학적 성숙, 한국교회가 당면한 역사적 과제
근래 심각한 타락으로 말미암아 급속히 쇠락해가는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성숙을 이루어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충실히 사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2장 교회안의 반지성주의,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강영안)
문제제기 : 한국교회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강영안 교수는 망설임 없이 곧장 ‘열심’이라고 답한다고 말했다. 모든 일에 ‘열심이 특심’인 교회가 한국교회이고, 열심은 한국교회의 자랑이다. 어느 지역, 어느 문화에서도 그렇듯이 교회가 시작되고 성장하는 과정에 그 지역 특유의 종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전통이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전통은 그 지역 교회를 키워가고 이끌어가는 방편(vehicle)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방해(obstacle)가 되기도 한다. ‘반지성주의’도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한국교회의 위기
한국교회의 위기를 ‘신뢰상실’이라고 생각한다. 바른교회 아카데미와 기윤실이 의뢰해서 전문 여론기관이 2008-2010년까지 3년간 연속으로 한 조사를 보면 교회 안팎에서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 신뢰상실의 이유는 흔히 우리가 ‘도덕적’이라 부르는 것과 관계있다. 전체가 아니라 부분적이라 해도 한국교회는 이러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도덕적 실패’를 막아내지 못했다. 하나님의 자녀는 ‘도덕주의’에 빠져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탈도덕주의’에 빠져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새로운 생명으로 인해, 새로운 빛의 생명이 맺은 열매로 인해 흔히 세상에서 ‘도덕적’이라고 부르는 결과를 가져온다. 에베소서 5장은 그것을 일컬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부른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신앙은 열심인데, 삶이 따르지 않는다”라는 말을 왜 듣는가? 한국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이른바 ‘이신칭의’교리의 영향으로 형성된 개신교회이다. 루터의 ‘이신칭의’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이란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터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로 인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선행은 믿음에서 필연적으로 우러나온 열매다.
2) 상식을 잃은 교회
‘도덕적 실패’ 못지 않게 한국교회가 신뢰를 잃은 이유 가운데 하나로 고려해야 할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사고와 행동이 아닐까 한다. 강영안 교수는 특별히 ‘교회세습’을 예로 들고 있다. 상식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적인 ‘상식’(common knowledge)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함께 사회를 이루면서 살아가자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의식”이란 의미에서의 ‘상식’(common sense), 곧 ‘공동의 의식’을 말한다. 이런 공동 의식의 기반은 곧 ‘지성’과 ‘이성’이다.
그런데 왜 교회 안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가? 강단에서는 여전히 무조건 믿음과 절대 순종을 강조하고 성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반지성주의’는 이것을 두고 붙인 이름이다. 잘못된 성속 이원론, 세상과 교회에대한 잘못된 이해가 원인과 더불어 지성과 이성에 대한 오해가 인본주의나 세속주으에 빠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살 때는 지성이나 이성을 사용하더라도 교회 생활과 신앙생활에서는 지성이나 이성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오직 믿음’만을 내세워야 하는 것처럼 오해한 것이다.
지성은 문자 그대로 ‘앎의 본성적 능력’을 말한다. 이성은 ‘추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지성과 이성을 합쳐서 넓은 의미에서 생각하는 능력이요, 앎의 능력이요, 판단하는 능력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지성이나 이성으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지성주의’ 또한 ‘반지성주의’못지 않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3) 신앙에 지성/이성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로마서 10:9-10에서 바울은 “마음으로 믿음”과 “입으로 시인”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고는 복음을 듣고 믿기까지의 과정을 바울은 일종의 ‘논리적 고리’형식으로 서술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는 데서 구원에 이르기까지는 여섯 개의 고리를 통과하는 것으로 말한다.
1️⃣보냄받음 2️⃣전함 3️⃣들음 4️⃣믿음 5️⃣주의이름을부름 6️⃣구원받음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들음에서 믿음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이야기할 것이다.
무엇을 듣자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듣는데도 적용된다. ‘아는 만큼 들린다’ 제대로 듣자면 마음이 가야 하고, 좋아해야 하고, 알아야 하고, 더욱더 알고 싶은 의지가 있어야 한다. 알아듣기 위해서는 비슷한 삶의 지평, 비슷한 관용구의 사용, 비슷한 사고방식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믿으려면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지성이 작용한다.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알아듣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알고 동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도 내가 절실하게 원하고 내 자신을 맡기고 의탁하고 신뢰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구주’라는 메시지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정보를 얻는 일에 그치지 않고 나의 결단을 요구하는 실존적 진술이기 때문이다.
들음에서 믿음으로 넘어가기까지 과정은
- 예수에 관해서 하는 말을 알아듣고
- 놀라고
- 내용을 생각하고
- 수긍하여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유보하거나 아니면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다.
루터와 칼뱅이 신앙에는 세 요소가 있다고 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앎(notitia)과 동의(assensus)와 맡김 곧 신뢰(fiducia)가 그것이다.여기에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모두 개입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빠짐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한다.
4) 믿음의 삶에서 지성과 이성
사람이 신앙으로,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 같은 지적 능력, 같은 추론 능력을 사용하더라도 사물을 보되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고, 추론을 하되 하나님의 나라 관점에서 추론하게 된다. 이것은 안셀무스가 ‘앎을 추구하는 신앙’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믿음은 이 땅과 저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지속적인 삶의 태도이고 삶의 기반이다. 예수를 믿는 순간의 믿음은 사랑과 소망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가는 데서도 지속된다. 따라서 믿음은 순간적이면서 동시에 지속적이다.
우리가 성령안에서 깨닫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삶에 필요한 것들을 아라내고 적용하는 데는 우리의 지성과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지성과 이성을 다스리는, 이보다 더 깊은 삶의 중심이 사실은 문제였다. 오랫동안 이성과 지성에 대한 오해로 인해, 그리고 그것을 실상 움직이는 것은 그보다 더 깊은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성과 지성을 그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의 백성들과는 무관한 것처럼 배제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치듯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그분의 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의 지성과 이성, 그리고 우리의 의지와 감정을 온전히 사용하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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